5화
송시아는 김탁민을 데리고 호대 근처 이곳저곳을 다녔다.
보세 옷가게에 가서 아이쇼핑을 하기도 하고, 맛있어 보이는 디저트 카페가 있으면 불쑥 들어가서 먹고,
전자제품 가게에도 들려서 이것저것 둘러보곤 했다.
-- 이거 진짜 신기하다~
은송님, 이거 봐봐. 막 휴대폰이 접혀!
-- 접히는 휴대폰은 이제 몇 년 전에 나온 거잖아.
-- 그랬구나... 대박 신기하다.
김탁민은 송시아를 보며 정말 순순하다고 생각했다.
자생교 남부 청년 회장이라는 걸 보면 사이비교에 엄청 심취해 있는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오히려 자생교라는 것에 심취해있었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 친구들이랑 이런 곳 많이 안 와?
여기는 핫플이라 술 마시러 오기도 하고 그럴텐데.
-- 나한테 친구는 교회 친구들밖에 없었어.
-- 아...
김탁민은 문득 송시아가 왜 자생교라는 사이비교에 빠졌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아마 그녀의 부모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끌리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둘은 간단하게 덮밥 종류로 끼니를 해결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덮밥 가게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둘은 얘기를 나누었다.
-- 오늘 재밌었어.
-- 나도 재밌었어...요.
-- 아직도 말 못 놓은 거야?
--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해서 말이죠...ㅎㅎ
정말 동갑내기 친구면 놓겠는데, 아무래도 한 살 오빠니까.
-- 오호, 그래도 예의는 있네?
-- 저는 예의없이 행동했던 적이 없어요.
-- 첫날에 탈의실에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본게 누군데.
-- 그 때 일은 말하지 마요. 속이 울렁거리니까.
-- 뭐 말 놓는 건 나는 상관없으니까, 편한대로 해.
-- 그러면 둘이 있을 때는 안 놓고, 이제 입학식 하고 다른 사람들 있을 때는 눈치봐서 놓을게요.
어쨌든 친구처럼 보여야 하니까.
-- 입학식도 가야 돼?
나는 작년에 했는데.
-- 입학식 당연히 가아죠.
송시아와 김은송의 대학생활 시작을 알리는 의미인데.
-- 별 거 없어. 걍 앉아있다 오는 거야.
-- 이제 뭐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앞으로도 관리 계속 해야 해요.
지금까지 알려드렸던 메이크업 연습, 피부 관리, 몸매 관리.
제모도 다음 주에 한 번 더 가야 하고...
-- 알았어. 이제 뱃살도 거의 빼서 없다고.
김탁민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으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러 술자리에 참석했기 때문에
김탁민의 배는 술배로 조금은 말랑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미션을 시작한 뒤로 다이어트와 요가를 하고 있어 축적되었던 지방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 잘 하고 있어요.
이제 은송님의 정체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네요.
-- 이제 얼른 먹고 가자.
나도 이제 피곤해.
여장을 하고 여자의 모습으로 바깥활동을 하는 것은 아직 김탁민에게는 매우 긴장되는 일이었다.
목소리 발성 하나, 행동 하나까지 신경써야 하는 지금으로는 한 시간만 있어도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 은송님, 오늘도 고생많았어요.
-- 너도 고생 많았어.
지하철 반대방향으로 가지?
-- 네. 저는 가다가 갈아타야돼요.
-- 그래. 조심히 가.
송시아는 김탁민이 탄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김탁민이 탄 지하철은 호대입구 전철역을 빠져나갔다.
==========
'지식의 요람, 인재 양성의 장'
오리대 입학식이 열리는 대강당 곳곳에 붙어있는 현수막에는 위와 같은 글귀가 써 있었다.
원래도 젊음의 패기를 풀풀 풍기는 대학교이지만, 입학식인 오늘은 특히 더 푸릇푸릇함을 뿜어내는 오리대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 나온 학생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하나 둘 씩 대강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송시아와 김탁민도 그 중 하나였다.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렸다.
바로 김탁민이 신은 검정 구두였다.
바로 옆에 있는 송시아는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 대박, 사람 짱 많아요.
-- 작년엔 나도 재밌었는데, 이렇게 신입생으로 또 오니까 재미 없는데...
거기다 지금 이 옷도 너무 신경쓰이고.
김은송은 검정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옷을 같이 맞춰 입자는 송시아의 말에 따라 일부러 고른 옷이었다.
-- 오늘 바람은 또 왤케 많이 부는 거야.
원피스 치마가 너무 나플나플거리잖아...
-- 조심히 걸으면 돼요.
특히 은송님은 안에가 보이면 안 되니까 더 조심하구요.
-- 그런데, 나한테 깔맞춤 하자 해 놓고 너는 왜 바지냐고.
왜 나만 치마입고 있는건데!
김탁민은 송시아를 노려보았다.
송시아는 긴 검정 슬랙스 바지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송시아가 이렇게 수수한 옷차림인 덕분에, 김탁민은 입학식이 기대되어
한껏 예쁘게 꾸민 신입생이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 검정룩으로 맞추자 했지, 원피스를 입으라 한 적은 없었잖아요~
지금 2월인데 얼어죽을 일 있나요 ㅎㅎ
-- 아오.. 다리 추워 죽겠네 진짜.
-- 그니까 스타킹이라도 좀 신지 그랬어요.
집에 많이 사뒀는데.
-- 아직 한 번도 안 신어봤는데 그걸 어떻게 신어.
-- 참 별 것 가지고 유난 떠네요.
그것보다 더한 것도 가지고 있으면서.
-- 뭐? 뭐가 더해??
-- ㅎㅎㅎ
투닥거리던 둘은 어느새 대강당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재학생 몇 명이 책자같은 걸 나눠주고 있었다.
책자를 받는 줄이 꽤나 길었기 때문에,
송시아와 김탁민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책자를 받았다.
-- 오리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감사합니... 헉
김탁민은 책자를 건네주던 남자의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바로 고민창이었다.
김탁민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학교에 오게 되면 아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은 몰랐다.
--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책자를 나눠주던 고민창이라는 남자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아, 아뇨!!
김탁민은 책자를 받은 채로 고민창을 지나쳐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그 와중에도 원피스의 스커트를 지키기 위한 본능(?) 이었다.
둘은 대강당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책자를 받아온 송시아는 김탁민에게 속삭였다.
-- 방금 누군데요?
-- 민창이형.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네.
이제 복학했구나.
고민창은 김탁민의 과 선배였다.
엄청난 인싸이자, 특히 여자를 너무 밝혀 악명이 높았다.
실제로도 하얗고 뽀얀 피부에 턱선이 살아있는, 마치 서양인을 연상케 하는 외모라 인기도 많았다.
-- 우리 과 선배 형이야. 같은 수업 몇 번 듣고 팀플도 해서 알아.
저 형, 맨날 회식도 이곳저곳 다니고 진짜 난봉꾼인데.
또 좋다는 여자애들도 많아서 참 저렇게 살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 조심해야겠네요.
-- 아는 형일 때도 별로 엮이기 싫었는데, 지금 모습으로 보니까 더 싫네.
-- 저도 조심할게요.
아마 은송님 못 알아봤을 거에요.
-- 그렇겠지...? 지금은 가발도 썼고 많이 달라졌으니까.
-- 어떻게 아는 남자 후배가 원피스 입고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있을 거라 생각하겠어요~
-- 너 일부러 그러는거지?
나 쪽팔리라고?
김탁민과 이제는 많이 친해진 탓인지, 부쩍 장난기가 많아진 송시아였다.
둘은 중간쯤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 좀 남았겠다.
-- 입학식 끝나면 또 뭐 있나요?
-- 보통 과에서 막 데려가서 이것저것 할 걸?
올 해는 어떻게 할 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너네쪽에 잘 말하고 있지?
내가 미션 잘 수행하고 있다는 거.
-- 그럼요. 올 해가 벌써 한 달 반 넘게 지났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해주고 있어요.
제가 저희 자생교 교회에 갈 때마다 잘 말씀드리고 있구요.
그리고 제가 볼 때는...
-- ...?
김탁민은 앉아있는 고개를 돌려 송시아 쪽을 바라보았다.
-- 이대로 쭉 김은송으로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 뭐라는거야...
나는 무조건 돌아갈거야.
지금 내가 재밌어 보여?
-- 네.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
지금껏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거니까.
-- 나는 그 때도 말했지만, 우리 엄마를 위해서 하는 거야.
-- 아직 열 달 넘게 남았고, 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 그런 소리 할 거면 그냥 말 하지 마.
김탁민은 신경쓰이는 일이 너무 많았다.
당장의 앉아 있는 치맛자락부터 신경쓰였다.
이렇게 허벅지 중간부터 종아리까지 맨다리를 내 놓고 앉아있는 것 부터가 불편했고,
입학식에 온 만큼 여기서부터는 아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당장 고민창을 만난 것만 해도 그랬다.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지금의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정말 자퇴를 고려해야 될 판이었다.
김탁민의 머릿속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한편, 2층의 재학생 대기실에는 학생회 및 입학식을 운영하는 직원들 일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방금 전까지 책자를 나눠주던 고민창이 있었다.
고민창 옆에 있던 한 학생이 고민창에게 말을 걸었다.
-- 민창이형~ 여기서 만나네.
-- 어? 야 오랜만이다! 그... 상병 때 휴가였나 그 때 술자리에서 보고 못 봤네.
너 학생회 하냐?
-- 올해부터 과학생회 하게 됐어.
우리 과 2학년 부회장이 내 고등학교 동기거든.
형도 학생회 한 건가?
-- 아니, 난 그냥 알바개념으로 왔지.
신입생들도 볼 겸 해서.
-- 뭐, 맘에 드는 신입생 있어?
-- 뭐... 있지.
고민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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