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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여장소설] 연애요람

[여장소설] 연애요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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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
김탁민은 지하철 문 쪽에 서서 그의 친구 정우배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 잘 지내고 있지?
    시험 끝나고 한 번도 못 봤네.

-- 그니까. 내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야.

-- 무슨 일? 근데 너 목소리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처음에 들었을 때 다른 여자가 받은 줄 알았어.


김탁민은 정우배의 말에 흠칫했다.
여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발성법을 연습하고 있던 김탁민이었는데,
지금은 친구인 정우배와 전화하고 있어 최대한 원래 목소리로 말하려고 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었다.


-- 감기가 걸렸나... 요즘 목소리가 좀 달라졌나봐.
    요즘 날씨가 추우니까. 콜록.. 콜록...

-- 건강 잘 챙겨라.
    나도 헬스 요즘 욕심 좀 생겨서 매일 다닌다.
    이제 스물한 살 됐으니 군대도 곧 가야되잖아.


김탁민은 지금 여장을 한 채로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카키색 바지에 흰색 목폴라, 회색 가디건을 레이어드하고, 그 위에 두툼한 검정 코트를 입었다.
신발은 약간의 굽이 있는 가죽 앵클부츠를 신고 있었다.

 



-- 알았어... 운동도 해야지.

-- 근데 무슨 일 하는데?
    새로 알바 시작했어?

-- 그냥, 일이 있어. 나중에 만나면 말해줄게.


김탁민은 나중에 만나자고 하면서도, 만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 매일같이 여장을 하고 다니는 탓에 지금 모습을 정우배에게 보이는 것은
죽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 우리 다음주에 수강신청인가?
    그 때 즈음에 카페에서 보는 거 어때?

-- 담주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내가 시간 되면 바로 말해줄게.

-- 알았어. 나 촬영 다시 들어가야겠다.
    나중에 봐.

-- 응. 알았어.


김탁민은 전화를 끊은 뒤 강한 현타를 느꼈다.
가장 친한 친구한테도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 이번 역은... 호대입구... 호대입구 역입니다.


김탁민은 지하철의 문이 열리자 부츠의 굽이 지하철 틈 사이에 끼지 않도록 조심히 내렸다.


-- 이 정도 굽도 조심스럽게 걷게 되네.


김탁민은 부츠의 낮은 굽으로도 걸을 때 꽤나 불편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조심스레 걸어가며 김탁민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AAA카페로 오세요."


카톡에 송시아가 보낸 메세지가 떠 있었다.
어젯밤, 송시아가 카톡으로 호대입구 역에서 보자 했기에 김탁민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 자기가 뭔데 오라마라야...


김탁민은 미션을 수행하겠다는 각서를 쓴 후, 송시아를 거의 이틀에 한 번 이상은 보고 있었다.
만나는 목적은 대부분 앞으로 여자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생활수칙(?)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 시간도 많나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


김탁민이 송시아에 대해 아는 정보란, 자생교 남부 청년 회장이라는 것.
그리고 올해 스무살이 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AAA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김탁민은 들어갔다.
붉은 벽돌 감성의 카페는 개방감있게 창문이 많아 어디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쿠키들과 빵들도 놓여 있었다.


송시아는 한 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은송님, 잘 찾아오셨네요.
    옷도 단아하게 잘 입으셨어요.

--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아직도 어색하네.


여장을 하고 여자의 모습으로 있을 때 김탁민으로 부를 수 없으므로
김은송이라는 이름을 정한 상태였다.


-- 탁민이라는 이름보다는 은송이라는 이름이 훨씬 예쁘고 부드러운 것 같은데.

-- 우리 엄마가 지어준 이름 무시하는거야?

--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 맨날 집에 오거나 샵으로 부르더니, 여기까지 왜 오라고 한 거야?

-- 일단은, 이걸 받으시죠.


송시아는 종이봉투 하나를 책상 위로 내밀었다.
김탁민은 열어보니 본인의 여장한 이름인 '김은송' 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그 동안 어디에서 살았는지, 형제자매는 몇 명이나 되는지 등등의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아무래도 스무살 여자애로 살아가려면 여러가지 내용이 필요하겠죠.
    헷갈리지 않도록 잘 정리해두었어요.
    물론 거기 내용을 전부 외우고 따라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도움이 되라고 만든 자료에요.

-- 너가 만든 거야?

-- 당연하죠. 은송님의 미션은 제가 전담해서 도와드리고 있으니까요.

-- 아니, 나한테 오빠가 있다는 설정은 또 뭐야?

-- 은송님한테는 두 살 위인 오빠가 있어요.
    현재는 군 복무중이라 지금은 볼 수 없죠.

-- 남자친구는 없었고 모태솔로?
    뭐 이렇게 설정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려나.

-- 앞으로 은송님으로 많은 남자들과 연애를 할 지도 모르는데,
    과거의 연애까지 생각하려면 피곤하니까요.

-- 알았어. 집 가서 읽어볼게.
    근데 고작 이거 건네주려고 부른 건 아니지?

-- 그건 아니고..... 저랑 오늘 데이트 한 번 하시죠.


김탁민은 마주앉은 송시아의 얼굴을 쳐다봤다.
방금 말하는 송시아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떨렸기 때문이었다.


-- 방금 뭐라고 했어?

-- 데... 데이트하자구요.

-- 너... 
    설마?


김탁민은 송시아가 설마 나를 좋아하나? 싶었다.
그렇게 집까지 찾아와서 여장을 시키는 것도 설마 그런 의도였나? 싶었다.


--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송시아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강한 부정을 했다.



-- 나는 또 왜 이런 미션이 나한테 왔지 했는데,
     그냥 사심 채우는 그런 거였구나.

-- 아니, 진짜 아니라구요!!
    애초에 지금 우린 여자끼리잖아요.
    데이트가 그런 데이트가 아니라...

-- 알았어. 가자.
    우리 그 동안 쌓인 정이 있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김탁민은 얼굴에 스윽 미소를 띄었다.
얼굴이 빨개져 있는 송시아의 얼굴을 보고 처음으로 송시아가 귀엽다고 생각해본 김탁민이었다.


김탁민은 송시아의 얼굴을 찬찬히 흝어보았다.
송시아는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얼굴이 정말 작아서 비율이 꽤나 좋았다.
둥근 얼굴에 귀여우면서도 눈이 크고 쌍커플이 있는 얼굴이었다.


-- 아니, 가긴 가는데!
    이것 하나만 확실하게 하고 가요.

-- 응.

-- 방금 제가 준 종이를 봐도 알겠지만, 은송님이랑 저는 중학교때부터 동갑내기 친구였다는 설정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저희가 친해져야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느껴서 말한 거라구요.

-- 근데 얼굴은 왜 빨간데?

-- 이거야 은송님이 오해했으니까...

-- 그니까, 자유롭게 둘이 놀자는 얘기지?
    이것 또한 다 미션 수행의 일부다, 이런 거잖아.

-- 그쵸~

-- 알았으니까 가자.

-- 네!


김탁민과 송시아는 카페를 나와 대학교 앞 거리를 이리저리 다녔다.
밖에서 다른 사람이 봤을 때에는 평범한 여자 두 명이 같이 거리를 거니는 것으로 보였다.


-- 근데 우리가 중학교때부터 동갑내기 친구라고 했잖아.

-- 그쵸.

-- 그러면 우리 말부터 놔야 하는 거 아냐?

-- 은송님은 말 놓았잖아요.

-- 그러게. 언제부터 내가 말을 놓았지?
    우리 만난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 첫날에 저한테 막 화내시면서 어느 순간 놓았어요.

-- 아... 그때는 화가 많이 나기는 했어.

-- 저도 그 때는 은송님이 당황스러웠을 거라 생각해요.

-- 말... 놓을래?


김탁민은 한 살 어린 송시아가 말을 놓는 게 조금은 꺼림직했지만,
어차피 여장을 하고 있는 동안 친구는 사실상 송시아밖에 없는 만큼
그래도 친해지는 게 좋겠다 싶었다.


-- 그럴... 까...?


송시아는 아까 카페에서처럼 다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 얘는 갑자기 캐릭터가 왜 바뀌었냐.
    처음에 봤을 때는 완전 냉정하게 미션 해야 된다고 막 말하더니.

-- 그거는... 일이었으니까요.

-- 이것도 미션 수행의 일부라며.

-- 그렇긴 한데!
    일단 여기 들어가요.

-- 뭐야, 어디야 여기는.


갑자기 송시아의 손에 이끌려 따라간 곳은 작은 소품샵이었다.
가게 안에는 여자 손님들이 북적였다.
남자 손님들은 대부분 여자친구를 따라온 손님으로 보였다.

 



-- 은송님은 이런 곳 와본 적 없...지?

-- 이런 곳 존재 자체를 몰랐어.
    수공예품 이런 거 파는 곳인가?

-- 아기자기한 것들 보는 재미가 있는 곳...이야.


김탁민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소품샵 내부를 흝어보았다.
한 쪽에는 케이스가 놓여져 있었고, 한 쪽에는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인형들,
또 다른 한 쪽에는 머리끈과 악세서리 같은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 와~ 이거 너무 귀엽다 ㅎㅎ

-- 귀엽긴 하...네.


돌고래 소리를 남발하는 송시아와 달리 김탁민은 그리 감흥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 이것 저것에 정신이 팔린 송시아가 꽤나 귀엽다고 느껴졌다.
여자가 된 다는 건 이런 것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일까...
김탁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 이 밀짚모자 써 보...올래?


송시아는 김탁민의 머리에 밀짚모자를 얹었다.


-- 응...?


해적왕이 될 것 처럼 보이는 밀짚모자를 쓰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니,
긴 머리카락이 양 옆으로 휘날렸다.


-- 귀엽다~ ㅎㅎ


김탁민은 송시아의 순수한 미소를 보고, 따라 미소를 지었다.


-- 너는 이거 써 봐.


김탁민은 송시아에게 또 다른 밀짚모자를 씌워주었다.
송시아의 머리가 너무 작아 밀짚모자가 쑥 들어가 이마까지 들어가버린 모습이었다.


-- 우리 진짜 귀엽다 ㅎㅎ
    사진찍어요!


송시아는 김탁민을 꽉 붙든 채로 휴대폰을 꺼내 셀카를 찍었다.
김탁민은 이런게 여자들끼리의 재미라는 걸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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