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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여장소설] 연애요람

[여장소설] 연애요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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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정우배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휴대폰을 뺏어버린 상황.
충분히 당황스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설명이 안 되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 납득시키려 하면 오히려 납득이 안 되는 법이었다.


김탁민은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뻔뻔하게 가야 한다.
어차피 1년 뒤 김은송은 없는 사람.
적당히 둘러댄다면 어찌돼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 안녕하세요. 오리대 컴퓨터공학과 신입생 김은송입니다!

김은송은 90도 직각인사를 했다.
정우배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김은송을 쳐다보고 있었다.


-- 선배님들에게 친하게 지내려면 장난을 쳐야 한다고 들어서 장난쳤습니다...
    죄송합니다.

-- 누가 그렇게 알려준 거야?

-- 그... 고민창 선배님이...


김탁민은 이럴 때 이름을 팔아먹을(?)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고민창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굳이 물어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 알았어. 다음부터 이런 장난은 치지 않는 게 좋아.
    일단 휴대폰부터 줘.


김탁민은 정우배의 목소리에서 그렇게 화가 나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일면식도 모르는 사람이 꽤나 심한 장난을 쳤지만,
여자 신입생의 귀여운 일탈(?)이라고 생각하면 넘어갈 법도 했다.


김탁민은 정우배에게 천천히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등 뒤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름이 은송이라고 했었나?

-- 네.

-- 잠시만, 전화 마저 하고.


정우배는 건네받은 휴대폰으로 어머니께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통화중이라는 안내메세지가 들렸다.
김탁민이 등 뒤로 전화를 걸어 김탁민의 휴대폰과 통화가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 통화중이시네.


정우배는 통화를 종료했다.
김탁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정우배에게는 자신의 미션인 여장에 대해 일절 말하지 말라고 메세지를 보내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정우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 근데 내 얼굴은 어떻게 안 거야?
   나 알아?

-- ..!


정우배는 186cm의 큰 키로 김탁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김탁민은 정우배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김탁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우배는 고등학교때부터 자신과 친구였던 만큼, 사소한 습관 하나로 의심받을 수 있었다.
전부터 송시아가 지겹도록 말했던 자세 하나, 동작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자신이 김탁민이라는 걸 의심할 수 있다.
차라리 여기서 지금의 자신, 김은송이 김탁민의 친한 동생이라 한다면...?
친척이라 하면 나중에 돌아가도 의심받을 수 있기에 친한 동생이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 탁.. 탁민 오빠랑 제가 친해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 탁민이?
     안 그래도 탁민이 찾고 있었는데, 혹시 탁민이 지금 뭐 하고 있는 지 알아?
     곧 개강인데 수강신청 때도 연락 안 되고 수업도 같이 못 듣겠어 이러다가.

-- 아..

-- 만나기 힘들거라 듣긴 했는데, 뭐 하고 있대?


김탁민은 생각했다.
여기서 모른다고 한다면, 정우배는 자신을 계속 찾을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자신이 1년동안 연락두절 될 이유를 잘 설명한다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외국으로 갔어요!

-- 외국?? 어디?

-- 그... 아프리카 쪽으로.


최대한 연락이 안 될만한 곳을 골랐다.
미국이나 일본에 갔다면, 연락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한 것이었다.


-- 여행이라도 간 거야?
     왜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갔지.

-- 자원봉사하러 1년 정도 간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휴학하고 급하게 간 것 같아요.


김탁민은 계속되는 긴장과 거짓말에 목 뒤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안 그래도 여장을 하고 여자로 생활하는 것도 긴장되는데,
자신의 절친인 정우배 앞에서 김은송으로 있으려 하니 너무나 긴장된 상태였다.


-- 자원봉사? 아.. 설마.
     어머니 신앙 활동 같은 걸로 간 건가?


정우배는 김탁민의 어머니가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김탁민이 어머니가 부탁한 여러가지 일로 힘들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자원봉사를 듣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 맞아요! 저도 어머니가 시키셔서 갔다고 들었어요!


김탁민은 생각치도 못한 자신의 어머니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싶었다.
사실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여장을 하고 이렇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김탁민이지만,
지금만큼은 어머니가 고마워졌다.


-- 알겠어. 탁민이도 연락 못하는 사정이 있겠지.
     알려줘서 고마워.


한숨 돌렸다 싶어 안도하는 김탁민이었다.
심지어 지금의 롱패딩을 입은 모습으로도 자신이 김탁민인 걸 눈치채지 못해 다행이었다.
그런 김탁민의 심정을 모르는 정우배는 김탁민에게 말했다.



-- 그럼, 밥 먹으러 가야지?

-- 네?

-- 선배를 알아보고 인사까지 해 줬는데,
     당연히 밥 사줘야지.
     신입생이면 여기 근처도 잘 모를텐데, 맛집 많이 알려줄게.

-- 아... 네!



어떨결에 정체를 들킬 위기를 막고, 밥까지 먹게 되어버린 김탁민은 
편의점에서 사온 음료수가 들어있는 봉투를 든 채로 정우배와 함께 걸어갔다.


=====
=====



송시아는 자신의 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자생교 남부 청년 회장인 송시아는 이제 곧 대학생으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신앙 공부도 해야 했다.


-- 은송님은 편의점 간다 했는데 왜 안 오는 거지.


송시아는 전화를 할까 하다, 진창훈이라도 만나나보다 싶어 그냥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김탁민과 정우배는 학교 근처를 한 바퀴 돌며 근처 맛집들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정우배가 알려주는 맛집들은 대부분 김탁민과 가서 먹었던 곳이었기에,
정우배가 설명하는 대부분의 메뉴와 맛 설명은 알고 있었다.


-- 여기는 닭볶음탕집인데, 밑반찬이 맛있어.
     가격도 싸고. 2인분에 15000원.

-- 헉 진짜 싸네요


김탁민은 정우배를 위해 열심히 리액션을 했다.
친구인 정우배는 자신을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이렇게 속이고 있는게 미안해서였다.


-- 라면사리도 무한이라 진짜 신입생 동기들이랑 꼭 와.

-- 네~ 감사합니다 ㅎㅎ


정우배의 말투는 원래의 자신과 있을 떄와 사뭇 달랐다.
당연하게도, 남자끼리 있을 때와, 여자후배와 있을 때의 분위기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정우배의 부드러우면서 다정한 말투에 김탁민은 조금은 재밌었다.


-- 자, 이쯤 둘러봤으면 이제 밥 먹자.
     편의점 들렸다 집 돌아가는 중이었다며?

-- 네네.

-- 얼른 먹고 들어가야지.
    여기 떡볶이 집 맛있는데, 괜찮지?

-- 네!


김탁민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정우배가 데려간 곳은 김밥/순대/떡볶이/튀김을 파는 옛날 분식집 스타일의 집이었다.
김탁민과 정우배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김탁민은 자신이 요가를 하다 나와서 요가복 차림이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롱패딩을 입고 있어 티가 나지 않았지만, 의자에 앉기 위해 겉옷을 벗자 입고 있던 요가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입고 있는 하늘색 요가복은 당연하게도 여성복이었기 때문에 꽤나 몸과 밀착되어 있어 김탁민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 집에서 운동해?


정우배는 김탁민을 보며 물었다.


-- 같이 사는 친구가 요가 알려준다 해서요...


김탁민은 부끄러움에 몸이 조금 떨렸다.


-- 그래? 일단 주문하자.

-- 저는 떡볶이 매운맛으로 1인분하구 순대요.

-- 매운맛? 이거 고춧가루 더 들어가서 엄청 매워.
     매운거 진짜 잘 먹어야 먹을 수 있을텐데.

-- 저 매운 거 잘 먹어요.

-- 알았어.


정우배는 앞에 있는 여자 후배를 보며 김탁민을 떠올렸다.
정우배는 친구인 김탁민과 둘이서 이 곳을 자주 오곤 했었다.
마침 오늘 알게 된 김은송이 김탁민이 자주 먹던 메뉴를 시키자 김탁민과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떢볶이와 순대, 튀김이 각각 담겨져 나왔다.


-- 잘 먹겠습니다~

-- 응, 맛있게 먹어.


김탁민과 정우배는 방금 나와 뜨거운 떡볶이를 호호 불며 맛있게 먹었다.
김탁민은 순대를 자신의 매운 떡볶이 국물에 묻혀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정우배는 말했다.


-- 너 아까, 김탁민과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 네. 친한 오빠죠.


김탁민은 자기 자신을 오빠라 부르는 게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뭔가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다보니 정말 자신이 김탁민이 아닌 김은송으로 느껴졌다.


-- 탁민이랑 여기 자주 왔어?

-- 음... 아뇨.

-- 탁민이랑 먹는 게 진짜 비슷하길래.
    둘이 여기를 와 본 건가 싶어서.

-- 아~ ㅎㅎ


김탁민은 겉으로는 웃는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꽤나 놀랐다.
시키는 메뉴, 먹는 모습 만으로도 원래 자신인 김탁민을 느끼고 있는 자신의 친구 정우배.
자주 만나다가는 정체를 들킬 수 있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배는 튀김과 자신의 떡볶이를 먹다가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김은송이라는 여자애가 김탁민이라면..?
김탁민도 마르고 예쁘장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여자처럼 있을리는 없을 것이었다.
정우배는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에 혼자 풋 하고 웃었다.


1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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