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92화 - 바람
동민이는 의심의 눈빛을 완전히 거두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일단 호칭을 정할게.
나는 형을 수철이형으로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지애라는 이름으로 날 만났고,
형이 자신을 지애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름으로 불러줄게.
지금의 모습으로 동민이한테 형이라 불리는 것은 너무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나를 지애로 불러주는게 편할것 같았다.
-- 지애라고.. 불러줘.
-- 알았어.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지애 너는 앞으로 여자로 살고 싶을 만큼
지금 생활에 몰입해 있고, 지금 재정이의 여자친구지.
내 말이 맞지?
-- 재정이의 여자친구는.. 아니야.
-- 그러면?
-- 재정이는 오늘 처음 봤어.
-- 재정이도 너가 남자라는 걸 알고 있는 거 아냐?
-- 맞아.
나는 동민이의 오해가 풀렸다는 안도감과,
여장을 하고, 지애로 살면서 겪었던 그간의 감정들이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지애로 살기 시작한 후, 항상 긴장해야 했고 누군가를 아프게 해야 했다.
내 후배 동민이와도 이런 상황이 생기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 사실... 앞으로 여장을 그만두려 했어.
이렇게 평생 생활할 수도 없을 거고,
지애라는 가상의 인물로 모든 것을 지어내는 것도 이젠 지쳐.
-- 많이 힘들었겠구나.
-- 자꾸 거짓말을 하게 돼고, 주변 사람들을 상처주게 돼.
이런 생활... 더 이상 할 수는 없어.
-- 네 잘못이 아니야.
--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애의 마지막을 이 선상 파티로 마무리하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어.
너를 만날 줄도, 이렇게 나를 밝힐줄도..
-- 울지마.
나는 또 다시 바보같이 눈물을 흘렸고, 동민이는 말 없이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연약하게도, 나는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선상의 내 방의 침대에 누워있었고,
동민이가 옆에 앉아있었다.
-- 이제 정신이 들어?
-- 여기는...?
-- 네 방이야.
너가 울다 잠들어서 방으로 옮겼어.
-- 재정이 오빠는?
-- 재정이한테 사실대로 말했어.
내가 고등학교 때 후배였다는 얘기,
내가 지애 너의 정체를 알았고, 앞으로 지애 너는 내가 보살피는 걸로.
-- 나를, 보살핀다고?
-- 응. 재정이 걔는 걱정 안 해도 돼.
알아서 파티에서 잘 놀고 있을 테니까.
오늘 미리 약속한 미팅이 많지만, 다 취소했어.
지애 너를 위해서.
-- ???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어리둥절했다.
-- 지애 너의 마지막이잖아.
마지막을, 나랑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 도.. 동민아.
내가 누군지 잊은 거 아니지?
-- 그럼. 잘 알지.
-- 나랑 파티를 함께 보내고 싶다고?
-- 이렇게 예쁜 여자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으니까.
-- 응..?
-- 그럼, 일어나! 한창 파티중이라고.
나는 동민이에게 이끌려 방 밖으로 나왔다.
벌써 해가 지고, 캄캄한 밤에 크루즈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를 헤엄치는 배, 그 위의 아름다운 파티가 한창이었다.
동민이는 크루즈의 맨 앞쪽으로 날 데려갔다.
짠 공기의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이 곳에서 크루즈를 내려다보니, 파티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 와... 예쁘다.
-- 지애야.
-- 왜..?
-- 우리 축제 때 기억나?
-- 기억나지. 그 때도 내가 여장하고 있었잖아.
-- 그랬지...
잊고 싶은 기억이었지만, 동민이는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 그 때 내가 누나라고 불렀었잖아.
그 때도 너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 때보다 더 예뻐진 너를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뛰었어.
흔들거리는 크루즈 때문인지,
동민이의 말을 듣고 있는 내 가슴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 동민아...
-- 오빠라 불러주면 안 되나..?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텐데..
-- 알았어. 오빠..
두근거리기 시작한 내 마음은 감출 수 없을 지경까지 타올랐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크루즈에 서 있는 남녀,
강한 바람에 내 드레스는 휘날렸고, 내 머리카락도 휘날렸다.
동민이는 내 허리를 감싸며,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었다.
동민이의 단단한 팔에 이끌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오빠, 고마워.
-- 뭐가..?
-- 이해해줘서...
그리고 같이 있어줘서.
-- 내가 더 기다려왔던 순간인데, 뭘.
그날 밤, 우리는 그 어떤 크루즈의 밤보다도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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